2017년 10월 20일 금요일

법정스님, 길상사 가을법문

가을입니다. 가을은 모든 것이 투명합니다. 
세상이 투명하고 공기가 투명하며 바람결, 물, 나무들 모두가 투명합니다. 
산사에서 사는 저희들은 귀가 굉장히 밝습니다. 
방안에 앉아있으면서도 낙엽이 구르는 소리, 풀씨가 익어서 터지는 소리, 
다람쥐들이 겨우살이를 위해서 부지런히 열매를 물고 가는 소리까지도 
다 들립니다. 가을은 이렇게 투명한 계절입니다. 

오늘 제가 법문 하러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출발지점에서 종점까지 빤히 보이는 길이라면 어떻게 될까. 
강원도에서 길상사까지 직선으로 전혀 거리낄 것 없이 빤히 뚫린 길이라면 
어떻게 될까. 뭐 이런 일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는 없지만 
만약 그런 길이 있다면 아마 질려서 운전하는 맛이 없을 겁니다. 
얼마나 무료하겠습니까. 졸리거나 사고 나기 마련입니다.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한동안 사고가 제일 많이 났잖아요. 
제가 한번 목포까지 그 길을 가봤는데 다른 고속도로에 비해서 직선이 많더군요. 곡선이 별로 없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도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앞날을 미리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겁니다. 
만약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앞날을 예측할 수 있다면 살맛이 안날 겁니다.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겁니다. 

여기 직선과 곡선의 상징이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빚어놓은 문명은 ‘직선’입니다. 
그러나 본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곡선’입니다. 
나무, 나뭇가지, 흐르는 강물, 산과 내, 해와 달을 보십시오. 다 곡선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만든 집이라든가 그 밖의 다른 구조물들은 거의 직선입니다. 직선은 조급하고 냉혹하고 비정합니다. 
그에 반해 곡선은 여유가 있고 인정이 있으며 운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곡선의 묘미’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만을 위해서 그 과정을 소홀히 한다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흔히 차를 타고 어디로 간다고 할 때 또는 어떤 집에 몇 시에 
도착한다는 예약이 있다면 가는 동안 많은 도정을 거치면서도 거의 도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시간 맞춰서 목적지까지 가려는 의식 때문에 도중에 보이는 사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표지점보다는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그와 같은 과정이 우리들의 일상이고 순간순간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미래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됩니다. 
순간순간의 쌓임이 세월을 이루고 한 생애를 이룹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우리나라 자살률 통계가 나왔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한 해에 12,000명이 자살을 하는데 특히20~30대가 많답니다. 하루 평균 32명꼴로 자살하는데 이는 교통사고 사망자 수인 23명보다 많습니다. 물론 자살하는 당사자에게는 죽을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허락받은 세월을 반납하고 도중에서 뛰어내릴만한 이유가 그 당사자한테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살은 혼자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 친지들과 이웃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깁니다.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은 무엇이든지 그 자리에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참고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사각 컴퓨터와 인터넷 앞에서 모든 것을 즉석에서 확인하는 조급한 습관 때문에 이런 현상이 오지 않는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 前세대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참고 기다릴 줄을 알았습니다. 참고 기다림을 통해서 이루어놓은 삶의 축적이 오늘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예전에 비해서 여유롭게 사는 것은 
선배들이 참고 기다리면서 가꾸어 놓은 열매들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더라도 서로가 길들일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그 자리에서 사랑이 익습니까. 
세월을 동반하지 않고는 사랑이 성숙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움터서 꽃피고 열매 맺기까지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받쳐주어야 됩니다. 어떻게 뿌리자마자 그 자리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까. 뜸 들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모든 것을 즉석에서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뜸 들일 시간이 없습니다. 

요즘 같은 전 지구적인 재앙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자연현상은 우연히 오지 않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다 메아리입니다. 

개인이 지은 업을 ‘별업(別業)’이라고 하고 
여럿이 함께 지은 업을 ‘공업(共業)’이라고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요즘 같은 전 지구적인 재앙은 인류의 오만한 ‘공업’에서 오는 겁니다.

전 지구적 재앙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것이 없습니다. 
현재와 같은 반자연적인 그릇된 습관부터 고쳐야 합니다.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타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반자연적인 행위입니까. 
사람은 뭡니까. 대자연속의 한 개체입니다. 
개체기 때문에 대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생명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자신의 목숨이건 남의 목숨이건 짐승의 목숨이건 식물의 목숨이건 
살아있는 생명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지 않으면 지구는 편할 날이 없습니다. 

전국 산부인과 집계에 의하면 연간 낙태시술이 35만 건이라는군요. 
하루에 1,000명의 어린 생명들이 살해되는 겁니다. 놀라운 일이죠.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나라만이 아니고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이는 생명을 너무 경시 한데서 온 결과입니다. 

낙태로 모든 것이 깨끗이 끝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업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싹을 꺾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를 의지해서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린 생명을 꺾는 것은 큰 죄업이 됩니다. 업이란 두고두고 연쇄적인 파장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이란..... 
꽃이 만발하고 단풍이 곱게 물든 세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돕고 도와주면서 살아가는 인정넘치는 그런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이 가을에 다들, 보다 투명하고 따뜻하고 어질고 
선량한 이웃이 되길 빌면서 오늘 제 이야기를 이만 마치겠습니다. 

<출처 : 불교신문 2005.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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